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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2016

나의 첫 만년필은 중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파이롯트(PILOT) 제품이었다. 모델명은 알 수 없으나 꽤 묵직한 금속으로 된 무광 블랙 만년필로, 파이롯트 커스텀 74(PILOT CUSTOM 74)를 닮은 바디와 클립에 에어로메트릭 필러(Aerometric Filler)가 달려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 가지고 다니며 노트 필기를 하곤 했는데, 매번 잉크를 넣는 것이 귀찮아서였던지 펜이 망가져서였는지 모르지만 1년도 채 사용하지 않았고, 그 후로 만년필은 완전히 잊고 지냈다. 그리고 25년이 지나 만년필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2016년 한 해동안 구매한 만년필에 대한 글을 모아보았다.


25년 만의 만년필, 펠리칸 소베렌 M800 블랙 (M)

2016년 여름, 인터넷 검색을 통해 만년필에 대해 알아보다 보니 처음 보는 독일 회사가 만든 만년필이 눈에 띄었다. 펠리칸(Pelikan)의 소베렌(Souverän) 시리즈다. 오래 사용해도 질리지 않을 듯한 원통형의 바디에서 전형적인 만년필의 모습이 느껴졌고, 펠리컨 부리 모양의 클립이 펠리칸 만년필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최근 펠리칸 닙(Nib, 촉)의 품질 문제가 있다고는 하나 좋은 평가가 대부분이었고, 내가 사용하기에 소베렌 M600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펜카페에서 소베렌 시리즈를 시필해 보니 M600보다 배럴이 조금 더 굵고 길며 무거운 M800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져 25년 만에 갖게 되는 만년필은 펠리칸 소베렌 M800으로 결정했다. 색상은 큰 고민 없이 배럴이 검은색인 블랙, 닙은 F(Fine) 닙과 M(Medium) 닙 둘을 놓고 고민하다가 조금 더 굵은 M 닙을 선택했다.

만년필과 함께 구매한 펠리칸 4001 브릴리언트 블랙(Brilliant Black) 잉크를 넣고 글씨를 써보았다. 캡을 돌려서 여는 방식, 처음 사용해보는 피스톤 필러(Piston Filler) 방식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사용하는 데에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끊김 없이 부드럽고 굵게 써지고, 오랜만에 꺼내어 써도 헛발질 없이 항상 같은 필기감을 느낄 수 있어 매우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사용하다 보니 만년필 선택에 두 가지 아쉬움이 있다.

첫 번째 아쉬운 점은 색상이다. M800을 갖게 된 후 만년필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되었고 그린 스트라이프가 펠리칸 만년필 고유의 문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전적인 검은색의 M800도 좋지만 그린 스트라이프를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색상보다 더 큰 아쉬움은 닙의 선택이다. 굵은 글씨가 멋있어 보여 M 닙을 선택했는데, 만년필을 실생활에서 사용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착오였다. 만년필을 갖게 된 후 실무에 사용하고자 했지만, 닙이 너무 굵어 가로줄이 있는 다이어리에 글씨를 쓰는 것이 불가능했다. 최종선택을 하던 순간에 M 닙은 너무 굵지 않냐고 했던 지인의 말에 마음을 바꿔 F 닙을 선택했더라면 더욱 자주 M800을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펠리칸 소베렌 M800 블랙.
펠리칸 소베렌 M800 블랙.

실무용 만년필, 라미 사파리 다크 라일락 (EF)

M800은 닙이 두껍기도 했지만, 펜이 너무 크고 부담스러워 자주 사용하기에 적당한 다른 만년필을 찾게 되었다. 지인이 추천한 바 있고, 주변에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라미(LAMY) 사파리(Safari)에 대해 알아보았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 사용하시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만년필에 관심이 없어 자세히 보지 않았던 라미 사파리. 사파리는 ‘없는 사람은 있어도 하나만 가진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만족도도 높고 색상도 다양하다. 라미는 매년 사파리의 스페셜 에디션을 발표하고 있는데, 2016년 에디션은 보라색의 다크 라일락(Dark Lilac)으로, 차콜 블랙(Charcoal Black)과 같은 무광 바디에 블랙 스틸 닙을 채용하였다. 사파리의 각진 그립부에 대해 호불호가 나뉘기는 하지만 초보들이 사용하기에 무난한 만년필로 보였다. 닙은 사파리에 많이 사용하는 EF(Extra Fine) 닙을 선택하고, 영문 잉크버로우체로 이름을 각인하기로 하였다.

사파리로 글씨를 쓸 때 종이를 살짝 긁는 듯한 서걱거림이 M800의 부드러움과는 확실히 다르다. 금 닙과 스틸 닙의 차이, M 닙과 EF 닙의 차이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동봉된 다크 라일락 잉크의 색상도 적당하고, 회사 다이어리에 필기하기에 적절한 크기의 글씨를 쓰는 데에도 문제가 없었다.

한동안 펜은 오직 사파리만 사용했는데, 계속 사용하다 보니 내가 원하는 글씨체가 잘 써지지 않았다. 노트를 정리하고 나서 보면 정갈하지 않고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한, 만년필보다는 수성펜을 사용하는 느낌이었다. 왠지 사파리가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게다가 주력으로 사용하기에 닙이 너무 얇았다.


F 닙의 파카 벡터 스텐스틸 (F)

사파리의 EF 닙이 불만족스러워 사파리용 F 닙을 구매할까, 저렴한 F 닙 만년필을 하나 더 장만할까 고민을 하던 중 지인이 파카 벡터 스텐스틸(Parker Vector Stainless Steel)을 추천했다. 한때 해외여행을 다녀오면서 선물용으로 많이 사던 파카 벡터 수성펜과 같은 디자인의 만년필이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하기에 부담이 없을 것 같아 파카 벡터 스텐스틸 F 닙을 구매했다. 사파리와 같이 영문 잉크버로우체로 이름을 각인했다.

부담스럽지 않은 무난한 디자인에 적당한 굵기의 닙이 마음에 들었다. 스틸 닙인데도 사파리보다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벡터도 문제가 있었다. 다이어리와 같이 글씨를 쓰는 용도의 종이에는 잘 써졌으나 A4와 같은 종이는 간혹 잉크가 잘 안 나오는 현상이 있다. 회사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A4에 글씨를 쓸 수 없으니 도무지 사용할 수가 없다. 또 이 만년필만의 문제인지 벡터가 가진 특징인지 모르겠으나 글씨를 쓰는 각도에 따라 굵기가 다르게 나오는 문제가 있다.

벡터에 적응해보려고 한동안 사용해봤지만 위 두 가지 문제로 인해 결국 잉크를 빼서 보관하고 있다. 함께 구매한 지인의 만년필은 저러한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 뽑기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첫 데몬, 펠리칸 클래식 M205 아쿠아마린 (F)

크리스마스 즈음 지인이 데몬(Demonstration) 만년필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냐며 모바일 메신저로 트위스비(TWSBI, 三文堂) 만년필 사진을 하나 보내왔다. 사실 이전까지는 데몬 만년필에 관심이 없었지만 펠리칸에서 만든 클래식(Classic) M205 아쿠아마린(Aquamarine) 이미지를 보고 매우 큰 관심이 생겼다. 라미가 매년 사파리 스페셜 에디션을 발표하듯이, 펠리칸도 매년 M200, M205 스페셜 에디션을 발표하고 있고, 2016년에 발표한 것이 바로 아쿠아마린이었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M205와 함께 발표한 에델스타인(Edelstein) 아쿠아마린 잉크가 포함된 기프트 세트를 구매했다.

처음 제품을 받아보고 작은 크기에 다소 당황하였고, 사진과는 다소 다른 색상에 실망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잉크를 넣고 글씨를 쓰는 순간 실망은 사라졌다. 스틸 닙임에도 부드러운 필기감, 다이어리에 필기하기에 적당한 굵기, 쫀득쫀득한 느낌이 나는 잉크와 정갈하게 써지는 글씨, 예쁜 색상과 포켓에 쏙 들어가는 크기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하나 없었다. 굳이 아쉬운 점을 하나 찾자면, 사파리, 벡터와 마찬가지로 영문 잉크버로우체로 이름 각인을 하였는데, 성을 모두 대문자로 각인해달라는 주문과는 달리 첫 글자만 대문자로 각인된 점이다.

펠리칸 클래식 M205 아쿠아마린.
소베렌 M800과 클래식 M205 아쿠아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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